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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강원인의 삶 "실향민의 삶"

저자명

엄경선

간행서

강원연구원 강원학연구센터

소장기관/
소장자

-

출판사

도서출판 산책

간행년도

2019

언어

한국어

총서사항

강원학지식총서 9

형태

도서

키워드
멀티미디어

https://youtu.be/MKNFq3eBARE

내서재 담기 인용하기
  • 아픔을 넘어 문화로 꽃피우는
    실향민의 삶

    “恨 去不去 來不來”

      갈래도 갈 수 없고 올래도 올 수 없어 한스럽다. 지난 1998년 미시령도로 확장으로 사라진 함경북도 길주명천 망향비에 새겨진 비문이다. 단 몇 글자로 속초 실향민들의 아픔을 간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1983년 ‘뿌리깊은나무’에서 펴낸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강원도편에서 속초를 소개하는 첫 장에 「실향민이 많이 사는 도시」라는 제목으로 수복기념탑과 이 망향비의 비문을 소개했다. 고향사람들끼리 모여 망향제를 지낼 때면 30년이 지난 그때도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쏟는 이가 많다고 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이제 실향의 세월은 70년을 앞두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일곱 번은 강산이 바뀌었을 세월이 흘렀다.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 어르신들도 많은 분들이 생을 달리하셨고, 그때 철모르던 어린 아이도 이제 일흔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혈육의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나라와 민족이 또 어디 있을까?

       길주명천 망향비는 지난 1998년 도로확장으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망향의 슬픔도 함께 잊혀 졌을까? 고향에서 내려온 지 70년의 세월이 지나도 분단의 상황은 변함이 없고 실향의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후손들의 의식 속에도 분단과 실향민의 한은 아련한 부모세대의 기억으로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분단의 시대가 끝나지 않는다면 트라우마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 대물림될 것이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속초는 실향민의 도시이다. 그러나 이제 속초는 단순히 실향민이 많이 사는 도시만은 아니다. 먹고 살고 바쁜 시절, 개인의 아픔으로 삭히거나, 같은 고향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며 달래 온 실향의 정서와 문화가 이제는 속초의 문화 정체성을 보여주는 지역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실향민의 도시 속초의 문화적 본성이 유감없이 표출되어 다양한 문화예술로 꽃을 피우고 있다.

      과거의 실향정서에는 ‘냉전’의 꼬리표, ‘적대와 대립’이 따라 붙었다면, 지금 문화로 꽃피워진 실향의 정서에는 ‘화해와 교류, 평화의 염원’이 내재되어 있다. 더 이상 속초는 ‘실향의 슬픔이 배어있는 도시’가 아니라, 실향의 아픔을 넘어 ‘통일과 화해를 염원하는 도시’로 바뀌고 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실향민들이 고단한 삶을 이끌어온 아바이마을은 속초에서도 꼭 가봐야 할 곳이 되었다. 속초 실향민문화의 정수라 할 ‘북청사자놀음’은 이제 속초를 전승지로 하는 ‘속초사자놀이’로 전승 발전되어 속초 고유의 향토문화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향민문화축제가 개최되어 다양한 실향의 문화를 여러 세대가 함께 공유하는 장이 마련되었다. 북한의 음식문화에서 비롯되어 실향민에 의해 전승 발전해 온 속초의 실향민 음식문화에 대한 관심도 남북화해의 물꼬가 트이면서 아주 높아졌다. 함흥냉면과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 식해와 함경도식 젓갈은 속초에 오면 꼭 먹어봐야할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 속초는 분단과 냉전에 상처받은 폐쇄적인 분단문화의 공간이었다면, 시대의 흐름과 사회의식의 변화에 따라 지금 속초는 실향민문화와 관광문화가 접목된 개방적인 통일문화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속초 실향민문화의 변화와 전환은 1990년대 이후 남북화해의 무드 속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남북한의 문화가 융합해 빚어진 속초의 실향문화는 남북화해와 교류의 토양이 되었고, 속초의 문화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남북 융합적인 속초의 실향민 문화는 향후 남북의 문화적 공감 형성과정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속초 실향민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짚어보는 일은 단순히 뼈아픈 분단과 갈등의 과거를 돌이켜 보는 과거 반추형 작업만은 아니다. 남북화해의 시대에 교류와 협력, 더 나아가 통일까지 갈망하는 미래지향의 작업으로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슬픔이 깊으면 기다림도 더욱 간절한 법. 인고로 새겨진 70년 실향의 아픔은 더욱 간절한 바람이 되어 남북의 화해와 교류를 이끄는 통일문화로 물결칠 것이다.